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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서랍속티켓북]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지금은 옹녀 시대?

발행일시 : 2020-03-25 00:00

요 며칠 대한민국을 들끓게 만든 텔레그램에서 벌어진 미성년자 성 착취 사건, 일명 N번방 사건에 충격과 분노를 보태며 이 글을 쓴다. 폭력과 폭행은 강자에 의해 약자에게 행해진다.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 수적(數的), 법적 등 여러 관점에서 강자와 약자는 달라질 수 있겠으나 성범죄의 경우 ‘대체로’ 가해자는 남성, 피해자는 여성인 경우가 많아, 이런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이제는 여성 인권이 많이 성장하여 양성이 평등하다는 의견에 쉽게 동의할 수 없고 과연 그러한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본 후에도 같은 물음표가 떠올랐던 기억이 있다.

올해는 7월에 부산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윤영옥 <올해는 7월에 부산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윤영옥>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여섯 마당 중 하나인 '변강쇠가'를 각색한 작품이다. 판소리 여섯 마당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에 '적벽가'와 '변강쇠가'를 포함한다. ​판소리와 창극의 차이를 요즘 시대에 맞게 풀어보자면,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연기하는 모노드라마라면, 창극은 많은 소리꾼이 각자의 역할을 맡아 연기를 하는 일종의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나는 판소리는 재미없다, 판소리는 지루하다 생각하다가 그 편견이 조금씩 깨​지고 있었는데 이 공연을 보고 완전히 깰 수 있었다.​ 판소리가 주는 매력, 독특함이 분명히 있다!​

​변강쇠와 옹녀.​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지 몰라도 '변강쇠가'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외면하고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부르지 않아서 다른 다섯 마당과 달리 그 곡조가 전해지지 않아 원형을 잃었고, 정력이 세다는 이미지만 남아 만화, 영화, 마당놀이 등등의 소재로만 사용되었다가 이번에 새로 대본을 쓰고 작창을 하여 '변강쇠 점 찍고 옹녀'로 재탄생시켰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6 공연 포스터 / 이미지출처 : 국립극장 페이스북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6 공연 포스터 / 이미지출처 : 국립극장 페이스북>

 
공연은, 일단, 재미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해서 한국말로 노래하고 있음에도 자꾸 자막을 쳐다보게 되긴 했지만.​
 
이 작품이 화제가 된 건, 프랑스에서 엄청나게 극찬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좀 신기했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색다를 수는 있지만 이 가사를 어떻게 번역했을까. ​처음 옹녀가 등장해서 '옹녀 문안 올리오.'라고 하는 말도 영어 자막으로는 단순하게 "I'm Ong."이라고만 번역되었던데 그 맛깔스런 대사, 가사들의 묘미를 과연 얼마나 전달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찬을 받았다니, 한국인이라면 그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남편으로 맞이하는 남자들은 모두 죽어 나가고 옹녀에게 추근대는 남자들도 모두 죽어버려서 옹녀는 마을에서 쫓겨나 남으로 내려가고​, ​이 여자 저 여자 홀리던 변강쇠도 다른 여자 찾아 북으로 올라가다가 황해도에서 옹녀를 만난다. 서로의 연분임을 알아챈 두 사람은 바로 이곳저곳을 떠돌며 같이 살기 시작한다. 그러나 변강쇠는 옹녀가 번 돈으로 노름이나 하고 싸움이나 하며 문제를 일으킨다. ​그 때문에 마을에서 살 수 없게 된 변강쇠와 옹녀는 지리산 깊은 숲속에 들어와 사는데 여전히 빈둥거리기만 하는 변강쇠를 보다 못한 옹녀가 나무라도 해오라고 채근하자 나가긴 나가는데 게으른 성격 어디가나. 낮잠 자다 밤이 되어 일어나서는, 나무 대신 길가의 장승을 뽑아 가지고 와서 땔감으로 쓴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6 공연 사진 / 이미지출처 : 국립극장 페이스북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6 공연 사진 / 이미지출처 : 국립극장 페이스북>

 
그래서 화가 난 장승들이 변강쇠에게 온갖 병을 다 주어 죽게 한다. 옹녀는 변강쇠를 살리기 위해 타고난 상부살과 성적 매력을 이용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승을 홀려 장승들이 정염을 못 이겨 불타버리게 만든다. ​전국의 장승들이 계속 사라지자,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장승의 우두머리가 옹녀를 찾아와 변강쇠를 만나게 하고 대책을 세우라 한다. 옹녀는 자신도 변강쇠를 따라 장승이 되어 영원히 함께하겠다 하였으나, 아기가 생긴 것을 알고 이승에 남기로 한다.
 
창극이라고 해서 고리타분하고 지루할 거라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 공연은 매우 현대적이다. 의상이 한복이고 노래가 판소리일 뿐이지, ​현대의 뮤지컬과 똑같다. 무대 연출도 무척 세련되고. 퓨전 사극 뮤지컬이라고 하면 되려나. 웃기기도 얼마나 웃기던지.

​주인공들의 특성상 야한 듯한 부분이 없진 않다. ​그런데 영화처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대사로 가사로 들려주는 것뿐이다. 그걸 듣고 어떻게 상상하는가는 관객의 몫. 이걸 유쾌한 해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거고 퇴폐적이고 유해하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6 공연 사진 / 이미지출처 : 국립극장 페이스북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6 공연 사진 / 이미지출처 : 국립극장 페이스북>

 
하지만 이 작품을 그저 야한 농담이 가득한 19금 공연이라고만 하기엔 너무 억울하다.
 
옹녀를 통해 보이는 진보적인 여성상에 주목하라.

당시의 여성은 남편 없이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부종사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던 시대에 여러 남편을 만나고 만나는 남편마다 다 죽어버리는 옹녀는 그야말로 '저주받은 팔자'의 최고봉일 테다. ​난봉꾼 변강쇠를 만난 후 변강쇠가 죽지 않고 자기 옆에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지만 사실 변강쇠는 옹녀에 비하면 형편없는 사람이다.
 
옹녀는 자신의 가정을 잘 이끌어가기 위해 삯빨래를 ​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만 변강쇠는 전혀 아니다. 아내가 번 돈을 모두 가져다 노름판에 쏟아붓고 술에 싸움에 빠져 살고 아이는 관심도 없고 밖에 나가 뭐라도 하라는 옹녀의 말을 귀찮아만 할 뿐이다. ​변강쇠가 땔감으로 장승을 뽑아와서 죽게 되었을 때도 옹녀는 변강쇠를 구하기 위해 모험을 하는데 난 그 장면을 보면서 변강쇠가 과연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싶더라만.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6 공연 사진 / 이미지출처 : 국립극장 페이스북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6 공연 사진 / 이미지출처 : 국립극장 페이스북>

 
​아무튼 그렇게 옹녀는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가고 이끌어 가는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인 것에 반해 변강쇠는 옹녀한테 기대어 사는 무능한 인간이다.
 
처음에 옹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팔자를 탓하고 자책하는 수용적인 인간이었다. 심지어 변강쇠를 따라 자기도 죽겠다고(장승으로 만들어달라고) 하기까지. 하지만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걸 알고 과감히 변강쇠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고 현실에 맞춰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옹녀의 캐릭터가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가 바로 이 작품이 추구하는 바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이제 변강쇠의 시대는 끝나고 옹녀의 시대가 왔다는 뜻이란다.

​그 점은 옹녀 어머니와 대조를 이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옹녀 어머니의 이야기는 양념처럼 잠깐 나왔다가 들어갔지만 나는 ​옹녀 어머니의 이야기가 정말 가슴 아팠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6 공연 사진 / 이미지출처 : 국립극장 페이스북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6 공연 사진 / 이미지출처 : 국립극장 페이스북>

 
옹녀의 꿈에 나타난 옹녀의 어머니가, 옹녀가 태어난 배경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 옹녀에게 어머니는 모른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만 들었을 때 관객들은 전부 웃었다. 옹녀 어머니도 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는 여자였구나, 옹녀가 엄마를 닮았구나, 뭐 이런 뜻으로 받아들였을 거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가 정말 충격적이다. ​옹녀 어머니와 아버지는 평범한 삶을 살던 부부였다. 하지만 전쟁통에 아버지가 죽고 어려운 세상에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자는 보호받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산에서 내려온 남자들이(전쟁 중이었으니까 병사들인 듯) 떼로 옹녀 어머니를 겁탈한다.
 
험한 일을 당한 옹녀 어머니는 자살을 결심하지만 배 속에 옹녀가 생겼음을 알고 죽기를 포기한다. 이때 연극 ‘빨간 시’도 떠올랐다. 연극 ‘빨간 시’의 주인공은 일제강점기에 위안부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역시 옹녀 어머니처럼 자살하려고 하지만 누구인지 모를 일본군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고 그 아이를 낳아 키운다. 모성애란 어찌 이리 지독한 것인지.
 
​어쨌거나 그렇게 태어난 옹녀의 상부살과 청상살은, 옹녀 어머니를 짓밟은 폭력적인 남성성에 대한 복수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래서 옹녀를 성적으로 탐하려는 남자들은 모두 목숨을 잃게 되고 옹녀는 남자가 없이도 혼자 살 수 있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임을 보여주기 위해 남편들이 그리 죽어 나간 게 아닌지.​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6 공연 사진 / 이미지출처 : 국립극장 페이스북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6 공연 사진 / 이미지출처 : 국립극장 페이스북>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무척 씁쓸하다.
 
지금을 옹녀 시대라고 할 수 있을까.
 
아직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잘못 없이 모르는 사람에게 살해당할 수 있고 지나가다가 폭행을 당할 수도 있고 너무 끔찍해서 기사로 읽기도 힘든 성범죄를 당할 수 있는 시대인데.
 
슬프지만 아직은 옹녀 어머니의 시대인 것 같다.

윤영옥 라이프&컬처팀 객원기자 lifenculture@nextdaily.co.kr

윤영옥 기자는 우리나라에 현대 뮤지컬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공연을 보며 자라온 뮤지컬 덕후다. 서랍 속에 고이 간직했던 티켓북을 꺼내어 추억 속 뮤지컬 이야기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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